벨기에 일상

[브뤼셀] 유럽 미술관의 꽉찬 하루

Alice1911 2022. 10. 20. 0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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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퇴근길 지나다니다, 가로등 밑으로 걸려있는 Shin Hanga (New Print) 전시 광고를 보게 되었다.

브뤼셀 아트 히스토리 뮤지엄


일본 여성을 동양적인 선으로 그려낸 삽화들은 흔하지만, 서유럽 한복판의 뮤지엄에서 20세기 초중반 일본에서 일었던 새로운 판화 유행에 대한 전시를 한다는 점이 특이했던건지, 단순히 아시아에 대한 향수가 자극도니 건지 알수는 없지만, 유난히 가보고 싶었더랬다.

뮤지엄 로비


오늘 드디어 갈증을 풀고 뮤지엄으로 가는날. 브뤼셀에서 살면서도 이곳에 한번도 와본적이 없다. 쌩껑트네흐(Cinquantinaire) 공원 옆으로 꽤 큰 규모로 자리잡고 있는 이 곳의 정식 명칭은 Royal Museum of Art and History다.


1847년, 벨기에가 새로이 왕국으로 탄생했을때, 그동안 있었던 벨기에 각지의 예술 콜렉션들을 한 자리에 모아서 만들어진 곳이다. 그 후에도 벨기에의 부유층들이 전 세계에서 가지고 온, 또는 수집해온 작품들이 기증되면서 콜렉션이 점점 커지고, 지금의 모습처럼 새로운 윙도 만들어졌다고 한다.

상설 전시실 내부


벨기에에서는 대부분 르네마그리트라는 걸출한 현대 예술가의 명성 때문인지, 르네 마그리트 미술관과, 왕립 미술관 (이 둘은 붙어있고 티켓도 두 곳을 함께 볼 수 있는 티켓을 사는게 더 경제적이다)만 거의 보게 되는지라, 이름도 흔해 보이는 예술 역사 박물관에 대한 관심이 상대적으로 적다. 나도 아마 일본 판화전시가 아니었으면 과연 가보았을까 싶다.

첫인상은, 박물관의 외관 만으로도 올만한 가치가 있을만큼 아름답다는 것이었다. 전형적인 중세 수도원처럼 회랑이 길고 회랑을 사이에 둔 네 면이 모두 각자의 전시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는데 규모도 매우 컸고, 로비 공간도 너무 아름다웠다.

건너편 밖으로 보이는 회랑


회랑에 내리비친 햇빛과, 회랑 천장의 굴곡에 햇빛이 다른 각도로 반사되어 입체적으로 보이는 모습은, 유럽의 아주 많은 곳에서 만날 수 있지만, 또 유럽에서만 볼 수 있는 특징이기에, 나는 이 수도원 구조의 회랑을 참 좋아한다. 평화와 따뜻함이 공존한다고 해야할까, 그런 느낌이 있다.

로마시대 유적 전시실



오늘의 뮤지엄은, 평일 오전 첫 타임 입장 덕에 그야말로 사람이 거의 없는 공간을 내가 온전히 누릴 수 있어 좋았다.

이곳은 일본 판화전시 같은 특별 전시 외에도, 이집트, 로마, 그리스 문명과 관련된 석조, 목조의 예술 작품들, 청동기, 철기 시대의 유적들, 이슬람, 아시아, 미국 문명 관련 전시까지 포괄하고 있는 유럽에서 가장 규모가 큰 예술박물관 중의 하나라고 한다. 일반 전시를 보려면 성인 10유로, 특별 전시를 보려면 성인 16유로를 내게 되어 있는데, 이 정도 규모라면 입장료가 전혀 아깝지 않은 수준과 규모의 전시다.

태피스트리 전시


상설 전시실 중에 르네상스 시대의 태피스트리를 전시해 놓은 곳도 참 마음에 들었다. 르네상스 시대의 부유층들은 저택의 벽면을 벽면만한 거대한 크기의 태피스트리 장식으로 꾸미는 경우가 많았다는데, 옆으로 5미터 이상의 거대한 직물 카페트가 전시실에 한가득, 성경의 에피소드들을 그림으로 그리듯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직물을 짜내는 기계도 함께 전시되어 있어서, 이런 거대한 작품을 목조기계로 앉아서 한땀한땀 짜내었을 수고를 상상할 수 있게 해 놓았다.


로비를 중심으로 반대편 윙으로 가니 드디어 일본 판화 전시를 만날 수 있다. "새로운 프린트", 라고 불리는 이 전시는 1900-1960년대, 현대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서양미술의 영향을 받아 판화 기술도 급속히 발달되던 시절에, 여성과 풍경을 중심으로 새로운 유행을 불러일으켰던 시기의 판화들을 150여점 전시하고 있다.

인물들의 경우, 워낙 익숙한 동양적인 선 흐름에, 원근법이 적용된 배경 같은 것이 없어 오롯이 평면적으로 인물을 그려내고 있는 화풍이 그리 새롭게 와닿지는 않았다. 오히려 눈길을 사로잡았던 건 풍경들을 찍은 판화. 산, 바다, 어부, 강, 농촌, 눈오는 풍경, 파도, 바위 등 자연의 한 장면 장면을 담백하게 촬영해 놓은 것 같은 깨끗한 느낌의 판화들이 꽤 신선했다. 사진으로 찍어놓은 것과는 또다른, 아주 사실주의적인 묘사이면서도 자연의 한 장면을 과감히 잘라내어 화폭에 담은 그 모습에서 어떤 자유가 느껴진달까.

풍경 판화


일본 미술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지만, 이걸 보러 일부러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만큼 마음을 울리면서도 따뜻하고 가벼워지는 전시였다.

풍경2


9월말엔 브뤼셀이 오히려 추웠는데, 어찌된 일인지 10월 중순의 지금은 해가 뜨면서 온도가 급격히 올라, 전시를 보고 나온 11시반 경은 이미 15도를 넘어있었다. 브뤼셀은 다른 유럽 주요 도시에 비해 주목을 덜 받지만, 숨겨져 있는 볼거리들이 많고, 덜 알려져있기 때문에 어디를 가도 좀 조용하고 여유가 있다는 커다란 장점이 있다. 1년이 넘게 살고 있는 지금은, 로컬로서 가지는 장점, 즉 한 장소를 여러번 가면서 그 느낌을 점점 더 다양하게 느껴볼 수 있다는 점이 참 감사하게 생각된다.

점심을 먹으러 차로 10분 거리의 그랑플라스로 향했다. 벨기에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를 두 곳만 꼽으라면 아마 브뤼셀의 그랑플라스와, 북쪽 도시인 브뤼헤일텐데, 그랑플라스는, 15년전 쯤 처음 왔을때나 살면서 자주 가보는 지금이나, 광장으로 들어서면서의 감탄이 달라지지 않는 곳이다. 다음 이야기는, 너무 익숙하지만 쓰지 않을 수 없는, 그랑플라스에 대해 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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